아비뇽

현재의 아비뇽은 산뜻하고 세련된 도시로 탈바꿈했으나 옛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구시가지는 교황이 건설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전형적인 중세도시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 때문에 아비뇽의 구시가지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역사에 관심이 있다던가 학창시절에 역사를 좋아했던 여행자라면 아비뇽을 잘 기억할 것이다. 역사적인 것 외에도 아비뇽은 해마다 여름에 열리는 연극축제인 아비뇽 페스티벌로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왕권과 교황권의 충돌, 아비뇽의 구 교황청 Le Palais des Papes

14세기에 완성된 고딕 양식의 웅장한 건물, 1309년 정치적인 이유로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로마의 바티칸으로 가지 못하게 되자 이곳에 머물며 교황청으로 이용하였다. 그 후 1376년까지 모두 7명의 교황이 이곳에 머물렀다. 견고한 석조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베네딕트 12세가 축조한 구 교황청과 클레멘스 6세가 새로 지은 신 교황청으로 나뉘어 있다. 교황청은 높이 50m에 4m 두께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난공불락의 요새를 연상케 한다. 이 성벽은 외국인 용병과 도적의 약탈로부터 교황청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웅장한 외관에 비해 내부의 전시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 있다. 교황청이 세워질 당시의 유물이나 가구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손상된 프레스코화만이 남아 있다. 그런대로 볼만한 곳은 추기경들이 모여서 교황을 선출하던 장소였던 그랑 티넬이다.




<아비뇽의 유수>란 무엇인가?

13세기말,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교황은 예수의 지상 대리인이기 때문에 모든 세속권은 교황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교황권이 쇠퇴하던 시기라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교황의 권력이 왕권을 넘어 선다는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필립 4세는 제후들의 지지를 받아 교황을 사로잡고 말았다. 교황은 곧 풀려났으나 굴욕과 충격으로 인해 1303년 사망한다. 보니파키우스 8세가 죽은 후 추기경단이 분열되어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다가 1305년 로마와 프랑스의 중립관계에 있던 클레멘스 5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클레멘스 5세는 필립 4세의 간섭 아래 로마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1309년 아비뇽에 새로운 교황청을 만들었다. 이를 <아비뇽의 유수> 라 하며 이 사건으로 한동은 교황은 완전히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Photo by Switzerland Tourism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 생 베네제 다리 Le Pont St. Benezet

교황청 뒤편으로 흐르는 론 강 위에 놓인 다리. 프랑스 동요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 의 무대가 됐던 이 다리는 아비뇽과 론 강 맞은편에 있는 필리프 탑을 연결하기 위해 12세기에 놓은 것이다. 원래 20여 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던 이 다리는 17세기 중반 강이 범람하면서 모두 소실되고 지금은 4개의 교각만 남아 있다. 이 다리는 신의 계시를 받는 베네제라는 성인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가며 모은 헌금을 일생을 마쳐 만든 것으로 유명하며, 그를 위한 예배당이 지금도 남아 있다. 현재는 교황청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Photo by Switzerland Tourism  

연극으로 하나되는 아비뇽 페스티벌

매년 7월 3주 동안 열리는 아비뇽 국제연극제Festival d’Avignon 은 아비뇽 전체가 연극인들의 무대로 변한다. 단정하고 조용한 시골마을의 아비뇽을 기대했다면 이 기간은 피할 것. 거리마다 골목마다 연극 포스터로 가득하고 관광객들과 무대와 똑 같은 의상과 분장을 한 채 홍보하는 연극 배우들로 아비뇽 시내는 시끌벅적 사람들도 가득하다. 아비뇽 광장에는 많은 팀들이 돌아다니면서 공연하고, 어딜 가나 즉석공연과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불어를 하지 못해도, 연극을 잘 몰라도 이 시기의 아비뇽은 모든 이들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연극으로 하나되게 만든다.

글 이은지
사진 프랑스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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