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의 순백 속으로… 여행의 로망 '남극'에 오다 [조선일보 2010.12.16]
작성자 : 장민정      작성일 : 2012/10/08      조회수 : 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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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순백 속으로… 여행의 로망 '남극'에 오다 (신발끈 후원)

브라운 기지(남극)=글·사진 채성진 기자 dudmie@chosun.com

남극 여행①

남극. 탐험가 혹은 과학자가 아니면 범접을 허용치 않는 대륙이다. 하지만 어디 지구촌 여행자들이 그런 허락을 받고 다니는 종족들인가. 극점까지는 아니더라도 남극 대륙에 발자국을 남기는 여행객들이 늘고 있다. 한 해에 4만 명에 육박하는 '관광객'이 이 대륙을 찾아간다. 남극해를 뚫고 가는 길은 대개 비싸면서 험악하지만 "별 다섯 개짜리 여행"이라는 여행자들의 소감은 하나 같다. 조선일보 주말매거진이 그 남극의 한쪽 구석을 다녀왔다.


남극 대륙을 감싼 거대한 수직 설벽은 시시각각 빛깔을 달리했다. 시선의 소실점까지 끝없이 이어진 눈의 지층. 눈의 호사가 따로 없었다
"오, 앤탁티카(Antarctica)!"

영겁(永劫)의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내린 눈이 쌓이고 쌓여 거대한 순백(純白)의 대륙이 되기까지는. 수백m 높이의 수직 설벽(雪壁) 앞에 선 여행자들은 말을 잃었다. 퇴적암 지층처럼 켜켜이 누적된 단면을 드러낸 것, 파도가 쓸고 지나간 듯 출렁이는 것, 도끼로 찍은 듯 주상절리처럼 세로로 쩍쩍 갈라진 것,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안으로 무너져 내린 것…. 모양과 결이 다른 하얀 벽이 시선의 소실점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눈이 시린 '스노 화이트(snow white)' 위에 햇살이 산산이 부서졌다.

남미 대륙의 끝, 아르헨티나 우슈아이아(Ushuaia)를 떠난 우슈아이아호는 사흘 동안 1200여㎞ 바닷길을 지나 남극 반도 서안(西岸)의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섬에 도착했다.

고무보트 조디악(Zodiac)에 올라탄 여행자들은 둥둥 떠다니는 유빙(流氷) 무리를 따라 눈과 얼음의 세계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거센 바람에 깎이고 파도가 다듬은 자연의 조각품들이 검푸른 바다 위에 만물상을 이뤘다. 포효하는 사자, 비상하는 독수리, 유유히 헤엄치는 고래의 형상이 그곳에 있었다.

코발트블루 잉크를 몇 방울 떨어뜨린 듯 영롱한 하늘빛 빙산을 마주칠 땐 절로 탄성이 터졌다. 수면 아래 잠긴 얼음덩이에서 은은하게 번져 나오던 푸르스름한 기운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 탐험대장 아구스틴 울만(Ullmann)이 "거친 눈 입자에 부딪힌 빛 알갱이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난반사 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우리들은 원래 그런 빛깔을 품고 태어난 빙산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려버렸다.

대륙을 감싼 설벽의 자태와 빛깔은 보는 각도에 따라 수시로 변했다. 멀리서 볼 때는 똑같이 하얀 빛깔이더니 다가서자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었다. 눈의 호사가 따로 없었다. 방금 비질을 마친 듯 깔끔하게 쓸어놓은 것, 동글동글 구슬을 깔아놓은 것처럼 돋을새김 돼 있는 것, 수천만 개 숨구멍이 나 있는 것 위에 빛의 스펙트럼이 찬란하게 펼쳐졌다.

깎아지른 벽에선 집채만 한 눈덩이들이 시도때도없이 굉음을 내며 바다로 추락했다. 예고 없이 나타난 인간의 접근을 막기 위해 대륙이 자신의 일부를 스스로 부숴가며 나타내는 거부의 뜻이 아닐까.

"극한의 고요(extreme silence)를 느껴봅시다." 울만이 조디악의 엔진을 껐다. 순간, 세상이 정지됐다. 출렁이는 파도소리, 바닷새의 울음소리를 빼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청명한 적막이 찾아왔다.
고무보트 조디악을 타고 남극해를 누비는 여행자들
조디악은 엔터프라이즈섬 서쪽의 포인(Foyn) 항을 향했다. 90여년 전 노르웨이 수송선 거버노렌호가 침몰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검붉게 녹슨 전장 60m 철제 선박의 잔해가 처연하다. 물 위에 모습을 드러낸 선실 부분은 도둑갈매기들이 알을 낳고 번식하는 안식처가 된 지 오래다.

"상륙!"

드디어 대륙에 상륙할 시간이 왔다. 레이더는 남위 64도 53분, 동경 62도 52분을 가리켰다. 눈 덮인 봉우리들이 삼면을 감싼 파라다이스만(Paradise Bay). 광활한 남극 대륙에서 몇 안 되는 접안(接岸) 포인트다. 아르헨티나의 브라운(Brown) 기지가 자리 잡은 천혜의 피항지(避港地)다. 그렇게도 요동치던 파도가 거짓말처럼 잔잔해졌다. 고래를 찾아 험한 바닷길을 지나온 그 옛날 포경선원들이 왜 이곳을 '낙원'이라 불렀는지 짐작이 갔다.

18개 나라에서 온 64명의 여행자들은 '제7대륙' 입성을 앞두고 적잖이 상기된 표정이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일반인들은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국가와 개인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극지 정복에 나섰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탐험가들의 전설이 서린 곳.

조디악에서 내려 첫발을 내디디며 가슴에 차오르는 벅찬 감격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기지 옆 봉우리에 오른 여행자들은 자신만의 '세리머니'를 펼쳤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온 롭 호게넬스트(Hogenelst)는 "꿈이 현실이 된 순간"이라며 부인과 뜨겁게 포옹했다. "고맙소. 당신과 함께 지낸 'BA(Before Antarctica·남극 이전)' 40여년 동안 참 행복했소, 'AA(After Antarctica·남극 이후)'에는 더 뜨겁게 사랑하리다." 알제리에서 온 하우다 베라(Berra)는 연인의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온 일흔셋 래리(Larry) 할아버지는 올해 초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아내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런던 총각 오스틴(Austin)과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온 로드리게스(Rodriguez)는 펄쩍펄쩍 뛰어다녔고, 일본 나가노 출신의 생물학도 다카노 료스케(高野亮介)는 "반자이(만세)!"를 외치며 설원(雪原)에 몸을 던졌다. 이스라엘 청년 모데하이(Mordehai)는 웃통을 벗고 하늘색 별이 새겨진 국기를 흔들었다. 바람 소리만 쓸쓸하던 남극 대륙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붉은 부리의 젠투(Gentoo) 펭귄, 검은 눈썹 앨버트로스 수천 마리가 서식해 남극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꼽히는 바리엔토스(Barrientos)섬, 기막히게 아름다운 양안(兩岸) 경치를 촬영하다 보면 필름을 모두 써버리게 돼 '코닥 갭(Kodak Gap)'이란 별명이 붙은 르메이어(Lemaire) 해협, 눈 속에 파묻혀 외로이 극지를 지키던 우크라이나 베르나드스키(Vernadsky) 기지…. 마음속 '남극 폴더'의 저장 용량이 차고 넘칠 만한 명소를 하나 둘 둘러보면서 나흘이 훌쩍 지나갔다.

영물(靈物) 범고래가 힘차게 뿜어내던 물기둥, 앨버트로스의 멋진 활공을 보며 터지던 탄성이 귀에 쟁쟁하다. 얼음 위에서 낮잠을 즐기던 웨델 바다표범(Weddell Seal)을 발견하고 숨죽여 조심조심 다가가던 순간의 가슴 졸임은 또 어떤가. 부스 아일랜드(Booth Island) 앞바다에 가득한 유빙 사이를 누비며 벌인 '남극 눈싸움'도 평생을 간직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20여개국을 돌아본 6개월의 긴 여정을 남극 대륙에서 마무리하고 아르헨티나로 돌아간다는 카롤리나(Carolina)의 얼굴이 낙조(落照)에 발갛게 물들었다. "영원한 나의 대륙 앤탁티카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남극 빙산 위에서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바다표범.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방문에 놀란 표정이다.
남극에서도 수영할 수 있다
디셉션(Deception)섬의 포스터(Foster)항. 1911년 노르웨이 고래잡이 선원들이 정착해 웨일러즈 베이(Whaler's Bay)라 불리는 이곳은 그때 20여년 동안 남극 고래잡이 전초기지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지금은 쓸쓸한 잔영(殘影)을 만난다.

섬 전체는 한쪽 끝이 뚫린 동그란 반지 모양이다. 거친 남극 바다도 이곳에선 숨을 죽인다. 하지만 수면 바로 아래 암초에 좌초하는 배가 많아 '지옥문(Hell's Gate)'으로 불리기도 했다. 해변 모래톱에는 어른 키의 열 배는 넘어 보이는 원통 모양의 대형 탱크들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녹슬어 가고 있었다. 바다의 노다지라 불리던 고래 기름을 보관하던 곳이다.

독주 한 잔에 취한 고래잡이 선원들이 떠들고 노래하며 외로움을 달랬을 건물은 나무 뼈대만 앙상히 남았다. 해군 선원들이 숙소로 사용했다는 건물은 지붕이 주저앉아 있었다. 포경선으로 물자를 실어나르던 작은 목선들은 쓸모를 잃은 채 모래톱에 파묻혀 해풍에 삭아갔다. 나뭇조각 하나도 원형 그대로 보존한 섬세함이 인상적이다.

해변에서 좀 떨어진 둔덕에는 선원들의 돌무덤이 있다. 바다를 보고 서 있는 나무 십자가에 쿨릭센(Culliksen)이라는 노르웨이 선원 이름이 새겨져 있다. 1871년 태어나 1928년 이역만리 외딴 섬에서 50여년 인생을 마감했다.

해변 곳곳에서 유황 냄새를 품은 안개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용암이 굳어 생긴 현무암이 수만 년 파도에 쓸려 만들어진 짙은 흑갈색 모래가 서걱거렸다. 화산 활동에 따른 지열 때문에 바닷물이 따뜻했다. 검정 모래 속에 손을 넣어보니 후끈한 기운이 그대로 전해진다. 보글보글 물방울도 솟아올랐다. "남극 대륙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탐험대원들의 설명에 두꺼운 방한복을 벗어던진 남녀들이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넵튠의 창문(Neptune's Window)'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에 오르니 끝없이 펼쳐진 남극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흑갈색 절벽 아래 파도가 철썩였다. 인간의 몸을 날려버리겠다는 듯 대양에서 불어온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여행수첩
①남극 대륙은 11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날씨가 풀린다. 기온이 영하 7도에서 영상 5도를 오르내리는 12월 초부터 2월 말까지가 남극 여행의 적기다. ②한국과 시차(時差)는 정확히 12시간. ③작년 한 해 동안 3만500여명의 여행객이 남극 대륙을 찾았다. 40~50대 중·장년층이 절반 가까이 되고 백발이 성성한 70대 노인도 많다. 순백의 자연과 야생동물을 체험하는 생태관광을 즐기려는 방문객이 최근 부쩍 늘었다.

한국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인천공항~카타르 도하(10시간)~브라질 상파울루를 경유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16시간)~1박~우슈아이아(4시간). 겁나게 긴 하늘길이다.


우슈아이아~남극: 남극행 우슈아이아호는 2900t급 크루즈선. 승객 84명과 승무원 38명 등 122명까지 태울 수 있다. 거칠기로 악명 높은 드레이크 수로를 지나 남셔틀랜드 군도(South Shetland Islands)에 도착하는 이틀 동안 적잖은 흔들림을 각오해야 한다.

남극 투어: 대륙 트레킹, 빙산 크루즈, 펭귄·물범·범고래 생태 관찰, 각국 과학기지 탐방 등 4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준비물: 방한·방수복과 방한모, 장갑과 선글라스, 자외선 차단 로션은 필수품. 하선할 때 꼭 신어야 하는 무릎까지 오는 장화는 준비돼 있다.

우슈아이아호 생활 ①영어와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사용된다. ②위성전화는 1분 통화에 3달러. 이메일을 보낼 수 있지만 인터넷 사용은 불가능. ③전압은 110볼트. 납작한 핀이 달린 전용 어댑터 필요. ④식사는 100% 양식. 남극 대륙을 떠나는 날에는 바비큐 만찬이 열린다.

한국 패키지: 배낭여행 및 오지 전문 여행사인 신발끈여행사(www.shoestring. kr·02-333-4151)에서 항공권과 앤타플라이 익스페디션(Antarpply Expediton)사의 크루즈 예약을 한 번에 끝낼 수 있다. 13박14일 상품 가격이 999만원. 신발끈측은 "모객이 쉽지 않지만 한국 여행문화 지평을 넓히기 위해 상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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