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Cuba)
쿠바 북쪽에 있는 미국이 별 짓을 다해도 아직도 쿠바에는 햇빛이 비친다. 쿠바는 카리브해에서 가장 크고 덜 상업화 된 섬이며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공산주의의 보루 중 한 곳이기도 하다. 끊임없는 혁명의 정원에서 모든 것이 장미 빛인 것은 아니지만(많은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탈출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쿠바의 정치적인 고립은 관광객이 지나치게 들끓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쿠바인들은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심지어는 이러한 봉쇄를 실시하고 있는 미국인마저 따뜻하게 환영한다! 비록 식민지 풍의 건축물이 길거리에 늘어서 있는 것은 보기 힘들지만 쿠바는 커다란 도시들까지도 상당히 편안한 분위기이다. 가장 요란법석을 떠는 것은 열정적인 차차차의 절정에 다다를 때이며 가장 시끄러워지는 것은 커다란 장식을 달아놓은 미국산 자동차가 빵빵거리며 질주한 다음이다. 이보다도 조용한 것을 원한다면 하이킹이나 수영, 동굴 탐험, 또는 야자수 그늘 아래서 좋은 담배를 피우며 느긋함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쿠바의 시골 오지나 해변이 가장 완벽하게 썰렁한 지역이 될 것이다
  • 통계 자료
  • 국명: 쿠바 공화국(Republic of Cuba)
    면적: 110,860 sq km
    인구: 1,100만명
    수도: 아바나(Havana, 인구 2,200,000)
    인종: 60% 스페인인 후손, 22% 뮬라토, 11% 아프리카인 후손, 1% 중국인 언어: 스페인어
    종교: 47% 카톨릭, 4% 개신교, 2% 아프리카계 흑인 심령주의
    정체: 공산주의 공화국
  • 지리 및 기후
  • 쿠바는 서인도 제도의 일부로 앤틸리스 열도 내에 위치해 있다. 아바나는 겨우 플로리다의 키웨스트에서 17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삐나르 델 리오 쁘로빈세(Pinar del R癌 Province)는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서 210km 떨어져 있다. 쿠바의 다른 인접국은 자메이카와 바하마, 하이티(Haiti)로 윈드워드(Windward) 항로를 건너 77km 떨어져 있다. 쿠바 본토는 세계에서 15번째로 큰 섬이며 104,945 sq km 넓이에 1250km 길이, 그리고 가장 넓은 곳이 191km 의 너비이다. 쿠바는 또한 220sq km 넓이의 후벤뚜드(Juventud)섬, 더 나아가 사람이 살지 않는 낮은 4200여 개 남짓의 암초나 작은 섬에 대해서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쿠바의 상당 부분은 가축들을 방목하고 사탕수수, 커피, 담배 등을 재배하는 비옥한 평지로 구성되어 있다. 동부, 중앙, 서부 산맥 등이 국토의 25%를 점하고 있으며 가장 높은 곳은 삐코 뚜르끼노(1972m)이다. 쿠바의 가장 긴 강은 343km의 카우또 강이지만 작은 배조차 다니기 힘든 곳이다. 북미와 카리브해의 표층은 자메이카와 쿠바 사이에 있는 7200m 깊이의 카이만(Cayman) 해구와 만나고 있기 때문에 지진도 쉽게 발생한다.쿠바에는 6000여 종이 넘는 식물이 살고 있으며 그 중 반 정도는 쿠바의 고유 종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왕야자(Reistonea regia)는 쿠바를 상징하는 문장이며 쿠바 내에 2천만 그루의 야자수가 있다고 한다. 쿠바의 다른 식물군에는 희귀종이며 기원이 선사시대인 백악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코르크 야자(Microcycas calocoma), 기근을 가진 무화과인 하궤이(jag y), 팔마 바리고나(커다란 벨리 야자), 세이바(신성한 판야나무), 그리고 쿠바의 국화인 하얀 마리포사 등이 있다. 남쪽 연안의 여러 곳은 망그로브 습지로 이루어져 작은 물고기나 조류가 살며 북부 연안에는 구불구불한 해변으로 이어져 있다. 쿠바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은 파충류로 악어나 이구아나, 도마뱀, 도롱뇽, 거북이 그리고 15개종의 독이 없는 뱀 등이 있다. 가장 커다란 육상 포유동물은 60cm 정도까지 자라는 나무 쥐인 후띠아(jut眼)이다. 쿠바의 새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새인 벌새 또는 순순시또(Zunzuncito)는 겨우 메뚜기보다 조금 더 크며 2g 밖에 나가지 않는다. 또코로로는 깃털이 빨간색, 하얀색, 파란색으로 쿠바의 국기와 같은 색이기 때문에 국조로 여겨지고 있다. 쿠바의 기온은 계절적으로 큰 변화가 없는 기분 좋은 아열대 기후로 북동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부드러운 무역풍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여름 우기는 5월에서 10월이며 건조한 겨울철은 11월에서 4월까지 계속된다. 평균 기온은 7,8월에 27도까지 오르고 2월에는 22도 정도이다. 연중 내내 습도는 평균 80% 정도로 우기라고 해도 조금 더 끈끈할 뿐이다.
  • 역사
  • 남미에서 쿠바 섬으로 처음 사람들이 건너온 것은 BC 3500년경으로 여겨진다. 이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수렵 채집 생활을 하였으며 뒤이어 농경 사회를 이룩한 아라왁 인디언이 합류했다. 스페인인들이 15세기 후반에 들어오기 전까지 100,000명에 이르는 쿠바 토착민의 3/4은 타이노어를 사용하던 아라왁인들이었다.크리스토퍼 콜롬부스는 1492년 10월 27일 쿠바를 발견하였으며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땅'에 홀딱 반했지만 스페인인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그들의 최초 기지를 이스빠니올라(Hispaniola)의 산또 도밍고(Santo Domingo)에 건설했다. 1512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뚜엘랴르(Diego Vel耿quez de Cu複lar)는 300명을 이끌고 이스빠니올라를 떠나 쿠바로 향하여 스페인령임을 선포하고는 2년 내에 일곱 곳의 개척지를 건설했다. 스페인인들은 수천 명의 원주민을 죽였으며 벨라스케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원주민을 모두 서쪽으로 쫓아버렸다. 그러나 쿠바는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1516년 벨라스케스가 멕시코로 네 번의 원정을 후원하여 그 중 1519년에서 1521년까지의 에르난 코르테스(Hern烱 Cort乶)의 정복이 이루어진 이후에 쿠바는 남미로 가는 스페인의 관문으로써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엔꼬미엔다 체제가 구축되면서 커다란 사유지가 형성되어 종교 교육의 구실 아래 인디언에 대한 노예화가 필연적으로 진행되었다. 1542년에 이 체제가 폐지될 때까지 혹독한 착취와 유럽인이 가지고 온 질병에 의해 인디언 인구는 5,000여명 수준까지 감소하였다. 이런 상황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고 스페인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하여 노예 노동력의 수를 유지했다. 북미의 노예 매매와 다르게 쿠바의 아프리카 노예들은 부족별로 함께 살도록 되어져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문화 중 몇몇 측면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목장에서 일하도록 보내졌고 소와 관련된 생산 - 가죽이나 말린 소고기 -은 18세기에 담배가 쿠바의 주요 돈벌이가 되기 전까지 기간 산업이 되었다. 점점 다른 유럽 국가의 세력이 카리브해의 스페인 지배를 위협하였는데 1655년에 영국이 자메이카를 차지하고 하이티는 1697년에 프랑스 수중에 떨어졌으며 쿠바 역시 계속해서 공격의 위협을 받았다. 영국 군대는 1762년 6월 6일 쿠바를 침입하여 아바나를 포위하고 11개월 동안 점령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은 4000 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고 쿠바의 무역망을 광대한 범위로 넓혔다. 1783년 미국 독립으로 인한 시장의 창출과 1791년 하이티의 노예 폭동으로 쿠바 설탕 생산의 최대 경쟁자가 사라짐에 따라 설탕 생산이 쿠바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수입되는 수만 명의 노예들 덕분에 1820년까지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설탕을 생산하는 국가였다. 1810년에서 1825년까지 시몬 볼리바르(Sim蚤 Boliv痙)가 남미에서 펼친 혁명 활동 이후에 서반구에서 스페인 식민지로 남게된 나라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뿐이었다. 스페인 충성파는 예전 식민지를 떠나 쿠바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쿠바의 첫 독립 전쟁은 크리올 농장주인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뻬데스(Carlos Manuel de C乶pedes)의 지휘하에 1868년 10월에 발발하였다. 10년 동안 200,000명이 죽었지만 결국은 반란군은 모든 힘을 다 써버렸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면을 보장하는 조약에 서명하였다. 스페인이 내부적인 자치권을 얻으려는 크리올 사회를 달래는 동안 미국은 이 식민지를 병합하려고 준비중이었다. 그러는 동안 일단의 쿠바 반란군이 미국으로 망명해 스페인 식민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시작했다. 그 중에는 국민적인 영웅이 된 시인이자 수필가인 호세 마르띠(Jos Mart縯)도 있다. 마르띠와 그의 군사 지휘관인 막시모 고메스(M經imo G藻ez)는 1895년 동부 쿠바에 상륙하였으나 몇 주 뒤에 백마를 타고 눈에 잘 띄는 마르띠는 스페인과 접전 중에 총에 맞아 죽었다. 고메스와 반란군 지도지인 안또니오 마세오(Antonio Maceo)는 서쪽으로 진군하며 지나는 동안 설탕 농장, 밭, 마을 등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스페인은 거의 내전 수준이 되어버린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무자비한 군인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를 보냈고 그의 대책은 성공했지만 쿠바의 농업 중심 경제는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1897년 6월 쿠바 독립에 대해 강경파의 입장을 고수하던 스페인 수상, 안토니오 카노바스(Antonio C烱ovas)가 쿠바와 연관이 있는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했고 새로운 스페인 정부는 쿠바에 대해 좀더 회유적인 접근을 시도했다.그러는 동안 미국은 쿠바를 병합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미국의 대중적인 신문들은 1898년 1월 아바나 항구 바로 바깥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메인호의 폭발을 두고 전쟁의 분위기를 선동했다. 이어 스페인이 쿠바를 $3억 불에 팔라는 제의를 거절하자 전쟁을 선포했다. 스페인이 항복하기 전까지 교전상태는 3개월 간 지속되었다. 미국의 선전포고는 쿠바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푸에르토리코와 괌, 필리핀을 병합하는 동안 군사적으로 쿠바를 점령하는 것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존 R 브룩(John R Brooke)을 쿠바 총독으로 세웠고 그와 그의 후임들은 공공 사업을 연이어 추진하여 학교를 세우고 공중 보건을 개선시키는 등 모든 것들이 쿠바가 미국에 종속되도록 계획하였다. Platt 수정조항은 미국이 쿠바 국내의 문제에 대해 미국의 자유 재량으로 개입할 권리를 주는 것으로 Platt 수정조항을 승인하거나 아니면 무기한 미국의 군사 지배하에 남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받은 쿠바는 울며 겨자먹기로 덜 나쁜 것을 선택하였다. 1903년 미국은 이 수정조항을 이용하여 관따나모(Guant烱amo)만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고 쿠바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도록 했다. 오늘날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이 기지는 쿠바에게는 모욕이며 미국에게는 말만으로 쿠바의 자율적인 결정권을 존중한다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1920년대 미국 회사들은 쿠바 농장의 2/3를 소유했으며 미국이 금주법 같은 것을 가지고 노는 동안 관세로 인해 쿠바의 제조 산업은 불구가 되었지만 도박이나 매춘에 기반을 둔 관광산업은 성행하였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물가가 급등하면서 사회적 동요로 번졌으나 헤라도 마챠도 이 모랄레스(Gerado Machado y Morales) 대통령에 의해 난폭하게 진압되었다. 1933년 8월 마랄레스는 쿠데타에 의해 제거되고 육군 하사관인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가 권력을 잡았다. 20년이 넘도록 부패한 바티스타가 정권을 잡고,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유지하는 동안 쿠바는 무너져갔으며 국가의 자산은 점점 외국의 손에 넘어갔다.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불공평은 마침내 젊은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에 의해 이끌어진 3년 간의 게릴라 활동으로 막을 내렸다. 바티스타는 4000만 US$의 정부 기금을 가지고 쿠바를 벗어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망갔다. 카스트로는 수상에 취임하자 즉시 국가 경제의 개혁에 착수하여 임대와 전기 요금을 내리고 400 헥타르 이상의 토지 소유에 대해서는 국유화하였다. 미국 소유의 원유, 전화, 전기 회사와 설탕 공장의 국유화에 따라 미국의 이익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미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대신에 미국은 쿠바의 설탕 수입을 줄였고 CIA는 카스트로를 전복시킬 새로운 혁명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 소련은 쿠바의 설탕 잉여분을 사들였으며 무역과 기술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쿠바의 중산층은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마자 대부분 쿠바를 탈출하였다. 이들 망명자의 대부분은 바로 물 건너 미국의 마이애미에 정착하여 격렬한 반 카스트로 운동을 벌이며 미국의 대외 정책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961년 4월, 1400명의 쿠바 망명자와 CIA에 의해 훈련 받고 무장된 미군에 의해 벌어진 피그만 침공을 물리친 데 대해 쿠바군을 칭찬하는 연설을 하며 카스트로는 최초로 쿠바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었음을 언급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Che Guevara)는 적극적으로 남미와 아프리카의 게릴라 단체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자이레, 앙골라, 모잠비크, 볼리비아(게바라는 볼리비아에서 미국 고문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살되었다), 에티오피아 등의 인민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나 고문을 파견하였다. 미국의 대응은 이들 나라의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쿠바에 대해 금수조치를 내려 양국 간의 교역과 여행을 엄격하게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소련이 제공하는 대규모 원조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경제는 황폐화되었고 양국 간의 관계 역시 1989년 동유럽이 무너지자 러시아가 11,000명에 달하는 군인과 기술자를 철수시키면서 곧 악화되었다. 미국은 엄격한 무역 금지 조치를 고수하였고 쿠바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빠르게 고립되었다. 1991년 12월 쿠바 헌법은 마르크스-레닌 주의에 대한 모든 언급을 제거하도록 고쳐졌다. 카스트로는 공공연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충성을 언급하였지만 소련식 모델에 대한 개혁은 벌써 물밑에서 진행 중이었다. 1993년 쿠바인이 미국 달러를 가지거나 사용할 수 있으며 100가지의 상업 분야에서 자영업을 허락하고 산지 시장을 여는 것을 허용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미국 달러 수입이나 이익에 대한 세금이 1994년에 징수되었고 1996년 10월에는 외국 회사가 전적으로 사업을 소유하거나 운영할 수 있으며 부동산을 매입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개방에 대해 미국이 취한 행동이란 해묵은 금수조치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1996년 헬름스-버튼 법령을 만들어 쿠바에서 몰수된 재산을 이용하는 외국 회사에 대해서는 미국의 투자자들이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쿠바에 대해 차관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충고하였다.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을 받아왔다. 정치적인 탄압으로 인해 단지 쿠바의 현재 지도체제를 비판한다는 이유나 정치적인 반대 세력을 규합하려 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진 양심수는 적어도 500여명에 이른다. 비록 이러한 상황이 한탄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힘센 이웃 나라인 미국이 항상 쿠바를 불안정하게 만들려 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황 바오로 2세는 1998년 쿠바를 방문하는 동안 쿠바 정부의 고집과 미국 정부의 금수 조치에 대해 함께 비난함으로써 이것을 인정했다. 당시 교황의 방문에는 5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이것은 미국이 양국 간의 직항편 운행을 2년 동안 금지시킨 조치를 철회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1998년 10월 찾아온 허리케인 죠지는 교황처럼 환영할 만한 것이 못됐다. 인명피해는 소수에 그쳤지만 수천 명의 주민이 수재민이 되었으며 많은 가옥이 거센 바람에 파괴되었고 더 많은 집들이 폭풍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번진 홍수를 피하기 위해 버려졌다.
  • 경제
  • 국내 총생산 GDP : US$ 550 억
    1인당 국민 총생산 GNP : US$ 4,819
    주요 산업: 설탕, 광물, 담배, 농업, 의약, 관광
    주요 교역국: 서유럽, 중남미, 러시아, 중국, 이란, 북한
  • 문화
  • 아프리카 노예들에 의해 전래된 리듬과 의식에 사용되는 춤은 쿠바로 전해진 뒤 스페인의 기타, 멜로디와 혼합되었고 미국은 이러한 음악을 자기 것인 양 발전시켰다(1920년대 미국은 룸바 리듬에 심취하였고 재즈 풍의 관악기와 드럼이 혼합된 이 음악은 커다란 재즈 밴드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콩가 춤은 여럿이 족쇄에 묶인 노예들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현대 쿠바의 춤은 아프리카출신 쿠바인들의 종교인 산테리아(Santer眼) 종교와 중요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쿠바 음악은 손(Son)으로 오리엔떼의 언덕에서 세기가 바뀔 무렵 발전하였고 기타와 트레스(세줄 짜리 작은 현악기), 더블베이스, 봉고, 클라베스, 마라카스, 그리고 목소리로 이루어진다. 맘보, 볼레로, 살사, 차차차 음악 또한 이 형태에서 나온 것이다. 쿠바 음악에서 가장 유명한 연주자는 뻬레스 쁘라도(P本ez Prado)와 베니 모레(Benny Mor渣)이지만 이들뿐만 아니라 쿠바의 음악은 계속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훌륭한 연주자들도 계속 멋진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쿠바의 가장 유명한 문학가는 호세 마르띠(Jos Mart縯)로 그의 인생과 사상, 순교자적 죽음은 그를 국민적인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외에 다른 중요한 문학가로는 시릴로 빌랴베르데 이 데 라 빠스(Cirilo Villaverde y de la Paz, 1812-94), 알레호 카르뻰띠에르(Alejo Carpentier, 1904-80), 니콜라스 귀이옌(Nicol硬 Guill輹, 1902-89), 귀이예르모 카브레라 인판떼(Guillermo Cabrera Infante, 1929-) 등을 들 수 있다. 쿠바의 영화제작자로 토마스 구띠에레스 알레아(Tom硬 Guti本rez Alea, 1928-96)의 '딸기와 쵸콜렛'은 높은 찬사를 받았으며 움베르또 솔라스(Humberto Sol硬)역시 국제적인 찬사를 많이 받는다. 화가인 윌프레도 람(Wilfredo Lam, 1902-82)과 마리아나오 로드리게스(Marianao Rodr謁uez, 1912-90)는 쿠바가배출한 가장 중요한 예술가들로 꼽히며마누엘 멘디베(Manuel Mendive, 1944- )는 쿠바의 현존 화가 중 최고로 여겨지고 있다. 혁명 이후에 예술은 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지원을 받아 많은 극장과 박물관, 예술 학교들이 설립되었고 음악가들은 급료를 보장받았으며 국립 영화 산업이 세워졌다. 정부는 북미의 대중문화에 의한 영향을 바로잡기 위해 아프로-쿠바 문화 단체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전체적인 문화 공연을 활성화했다. 역사적으로 카톨릭이 쿠바의 지배적인 종교이며 현재도 이러한 영향이 남아있어 40%에 이르는 쿠바인은 적어도 명목상으로나마 카톨릭교도이다. 4% 정도의 인구가 개신교이며 2%는 아프리카계 흑인 심령주의자로 산테리아교의 신봉자들이다. 산테리아 신자들의 조직 제도적으로 느슨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쿠바인들의 대다수가 이 아프리카계 카톨릭 종교와 어떤 방향에서든 관계가 있으며 1992년 정부가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끝냄에 따라 신도의 수도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쿠바의 메스티조 문화와 마찬가지로 쿠바인들은 카톨릭을 노예들에 의해 전래된 아프리카의 신앙과 접목시켰고 이 결과로 주요한 카톨릭 성자들에 상당하는 아프리카계 쿠바인들의 신들이 생겼으며 종종 동물 공양도 이루어진다. 바오로 2세가 쿠바의 수호 성인인 누에스뜨라 세뇨라 델 라 카리다드 델 코브레(Nuestra Se絪ra de la Caridad del Cobre)를 성인으로 인정할 때 산테리아 신봉자들 역시 자랑스러움을 느꼈는데 이는 그들이 세뇨라 코브레와 산테리아교의 사랑과 풍요의 여신인 오츈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쿠바의 음식은 스페인과 아프리카의 솜씨가 혼합되어 쿠바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사용한 것이다. 모로스 이 크리스띠아노스(무어인과 기독교인; 검은 콩과 쌀), 아로스 콘 뽀이요(닭고기와 쌀), 빠카띠이요(잘게 저민 소고기와 쌀) 등이 일반적이며 바나나, 이집트 콩 또는 콩으로 만든 수프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쿠바는 식량부족을 겪고 있으므로 외식하려면 정부에서 운영하는 식당이나 호텔 식당에서 긴 줄을 서야할 때도 있다. 쿠바의 맥주는 맛있으며 칵테일은 전설적인 것이다.
  • 축제 및 행사
  • 아바나, 산띠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 바라데로(Varadero)에서 열리는 쿠바의 카니발은 1990년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의해 중지되었지만 2월 내내 금,토,일 저녁에 야외 공연을 벌이며 아바나의 카니발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호르나다스 데 라 쿨뚜라 카막네야나(Jornadas de la Cultura Camagneyana)는 2월 처음 두 주에 계획되며 아바나 국제 재즈 페스티발은 2년에 한번씩 2월에 열린다. 4월에는 바라코아(Baracoa)에서 열리는 세마나 데 라 쿨뚜라(Samana de la Cultura)와 바라데로의 전기 음향 음악 축제가 있다. 또한 5월 첫째 주는 올귄(Holguin)의 로메리아 데 마요(Romer眼 de Mayo)가, 6월의 마지막에는 트리니다드(Trinidad)에서 열리는 산후아네라스(Sanjuaneras) 축제가 있다. 카리브해 문화 축제는 6월이나 7월에 열리며 10월에는 10일 동안 아바나 현대음악 축제, 11월 하순에는 트리니다드에서 세마나 데 라 쿨뚜라 트리니따리아(Semana de la Cultura Trinitaria)가 열린다. 마지막으로 아바나에서는 매년 12월에 국제 중남미 영화축제가 열린다.
    공휴일
    1월 1일 - 해방의 날
    5월 1일 - 노동절
    7월 25-27일 - 국가 혁명 기념일
    10월 10일 - 쿠바 문화의 날
    크리스마스는 쿠바에서 공휴일이 아님.
  • 여행자 정보
  • 비자: 실제상으로 모든 여행자들은 쿠바 비자나 여행자 카드를 받아야 하며 여행사나 여행 알선업체 또는 쿠바 영사관에서 1개월 체제 허가를 받을 수 있다. 미국은 허가를 받지 않는 한 자국민들의 쿠바 여행을 금지시키고 있다.
    보건위생: 수돗물을 그냥 마시면 즉시 체중 감량이 일어나며 간염 A가 발생할 확률도 있다.
    시간: 한국보다 14시간 늦다
    전압: 110-230V, 3상 60Hz
    도량형: 미터법과 함께 변형된 미국, 스페인의 도량형을 함께 씀(도량형 환산표 참조)
    여행산업: 연간 700,000만 명의 관광객
  • 경비 및 환전
  • 통화: 쿠바 페소와 미국 달러(1993년 미국 달러의 사용이 합법화된 이후 버스요금, 기차에서의 식사 그리고 기타 몇 가지에만 페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쿠바에서는 신용카드나 여행자수표가 무용지물임에 주의할 것. 신용카드는 오직 미국과 제휴관계가 없는 은행의 것만 허용됨.
    일반경비
    저렴한 식사: US$2-3
    레스토랑의 식사: US$10-15
    저렴한 숙소: US$10
    호텔: US$20-30

    카리브해를 보는데 있어 쿠바는 적당한 가격대의 나라이다. 민박이나 수수한 호텔에서 지내고 검소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하루 US$50로 편안히 지낼 수 있다. 중간 가격대의 휴양지 호텔에서 묵으면서 세끼를 다 해결하려 하면 하루 $100 정도는 들여야 한다. 요즘에는 쿠바 페소가 큰 역할을 하지 못하므로 경비를 줄이려고 암시장에서 환전하는 것도 그리 커다란 이익이 되지 못한다. 실제로 외국 여행자들에게는 어떤 것이든 미국 달러나 그만한 가치의 페소로 지불하도록 기대한다. 아메리칸 엑스프레스, 시티뱅크, 다이너스 클럽 같은 미국계 회사들이 발행한 신용카드나 여행자 수표, 또는 뉴욕을 통해 처리되는 여행자 수표 등은 쿠바에서 소용이 없다. 유로체크도 역시 받아주지 않는다.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싶으면 비 미국계 은행이 발행한 비자나 마스터카드를 가져가야 한다. 미국 달러로 표시된 토마스쿡과 비자 여행자 수표는 미국 은행이 발행한 것만 아니면 받아준다. 팁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며 한때 적극적으로 배격되던 것이었지만 호텔이나 식당에서 좋은 서비스를 받았다고 느낀다면 약간의 팁으로 감사의 표시를 할 수도 있다.

  • 여행 시기
  • 쿠바를 방문하기 안 좋은 시기란 없다. 덥고,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은 5월에서 10월까지이며 겨울(12월에서 4월)은 쿠바의 여행 성수기로 캐나다인과 유럽인들이 남쪽의 따뜻한 햇빛을 찾아 떼거지로 몰려든다. 쿠바의 휴가는 7월과 8월에 있으며 이때 해변들이 가장 붐비는 시기이다. 크리스마스, 부활절, 혁명 기념일을 축하하는 7월 26일 근방도 역시 매우 바쁜 시기이다.
  • 주요 여행지
  • 아바나(Havana)
  • 아바나(La Habana)는 카리브해의 여러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이며 쿠바의 중심지이다. 혼란스런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바나는 전쟁과 혁명에 의해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100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서있다. 시내의 분위기는 저물어간 옛 영화를 반영하듯 5, 60년대 유행하던 커다란 미국 자동차들이 아직도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며 페인트와 회반죽이 벗겨진 건물이 도시 여기 저기에 놓여있다. 가끔 눈에 띄는 것은 번창하던 옛 스페인 식민지 시대 건물들로 대부분 보수 중이다. 아바나의 밤은 노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도 지쳐버릴 정도로 매우 활기찬 것으로 영화관, 유명한 극장, 카바레, 나이트클럽, 그리고 음악이 연주되는 많은 장소들이 있다. 아바나는 평균적인 다른 중남미 도시에 비해 왕래도 적으며 덜 상업화되어 있다. 그러나 어색하게 빛나는 낡은 시가지에서부터 초라하기도 하고 엄청난 폐허같기도 한 주택가 사이에서 뻗쳐 나오는 것은 아바나 주민들의 넘칠듯한 친절함이다.
  • 산띠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
  • 산띠아고 데 쿠바는 문학과 음악, 정치에서 아바나의 경쟁 도시이며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키는데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혁명의 요람'으로도 여겨지고 있다. 쿠바에서 제 2의 도시이며 쿠바의 다른 마을과 다르게 지난 세기에 이곳에 정착한 프랑스 농장주들과 하이티인들의 영향으로 카리브해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이 도시의 독특한 특징은 또한 아바나로부터 고립된 데도 이유가 있으며 아바나만큼이나 화려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산띠아고 데 쿠바의 최초 시장은 멕시코를 침략했던 에르난 코르테스이다). 이 도시는 쿠바에서 가장 오래된 궁전들과 카세 데 디에고 벨라스케스(Casa de Diego Vel耿quez), 무니시빨 바카르디(Municipal Bacard衍)박물관 등을 포함해 여러 박물관들이 있다. 도시의 전경은 산띠아고 데 쿠바 만을 굽어보고 있으며 많은 집들이 레이스 모양의 철제 장식을 단 발코니와 뾰족한 창문, 좁은 외부 계단 등을 가지고 있다. 코멘떼리오 산따 이피헤니아(Cementerio Santa Ifigenia)는 많은 혁명가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호세 마르띠 역시 이곳에서 미이라로 전시되어 있다.
  • 트리니다드(Trinidad)
  • 트리니다드는 1514년 세워졌지만 오래된 역사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후반까지 후미진 밀수업자들의 은신처였다. 밀수업자들은 영국이 지배하던 자메이카로부터 노예와 금을 들여왔지만 이러한 것들이 모두 바뀌게 된 것은 19세기 초 하이티의 노예 폭동으로 프랑스 농장주들이 트리니다드로 도망 오면서 이곳에 그들의 작은 제국을 재건설하면서부터이다. 트리니다드는 독립 전쟁이 이 지역의 설탕 농장을 모두 파괴하기까지 번성해고 이후 도시는 다시 어둠에 빠졌다. 짧은 설탕 붐으로 인한 부의 흔적은 도시의 바로크 성당 탑이나 카라라 대리석 마루, 철제 격자 그리고 황폐한 저택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트리니다드의 박물관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지방 역사 박물관이며 전통적인 기법을 아직도 사용하는 도자기 공방인 탈레르 알파레로(Taller Alfarero)도 볼 만하다. 쿠바에서 가장 뛰어난 해변 중 몇 곳은 트리니다드 바로 바깥에 있다.
  • 바라코아(Baracoa)
  • 바라코아는 쿠바의 가장 동쪽 지점인 카보 마이시(Cabo Mais衍)근처의 두 아름다운 만 사이에 있는 곶에 위치해 있다. 1512년 디에고 벨라스케스에 의해 세워진 이 마을은 쿠바의 가장 오래된 유럽인 개척지이다. 마을은 1960년대에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길이 건설되기까지 오직 바다를 이용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바라코아의 분위기는 아주 느긋하며 풍성한 야자수가 서있는 해안은 남태평양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곳이 중요한 스페인의 전진 기지였다는 것은 인상적인 세 요새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는 지방 박물관을 소장하고 있는 마타친 요새, 식당으로 개조된 뿐따 요새, 그리고 쾌적한 호텔로 변해있는 세보루코 성이 그것들이다.
  • 삐나르 델 리오 쁘로빈세(Pinar del R癌 Province)
  • 하이킹이나 동굴탐험, 자연탐사를 좋아한다면 쿠바의 서쪽 끝에 위치한 이 지역이 적격이다. 이 지역 전체를 흐르는 175km의 코르디이예라 데 과니과니코(Cordillera de Guaniguanico)외에 이 지역은 약 26km의 수많은 석회암 동굴을 자랑하며 석회암 기반 아래로 강들이 흘러 지나간다. 비냘레스(Vi人les)에는 오랜 기간 침식되어 이상한 초현실주의적 생김새를 가지게 된 석회암의 뾰족한 탑들이 있다. 이곳은 아마 쿠바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일 것이며 이 지역 해안에는 훌륭한 요트 정박장과 깨끗한 물, 장관을 이루는 산호, 그리고 한산한 백사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스쿠버 다이빙 장소이기도 하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 바야모(Bayamo)
  • 바야모는 그란마(Granma)주의 주도이며 쿠바의 최남단으로서 관광객이 드문 곳이다.이곳은 쿠바가 자유를 위해 투쟁할 당시 중요한 지역이었는데 1956년 12월 2일 카스트로와 81명의 반란군이 그란마호를 타고(여기에서 주 이름이 생겼다) 카보크루스(Cabo Cruz)에 상륙하였다. 또 이곳은 독립전쟁이 1868년 10월 발발하여 크리올 농장주인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뻬데스(Carlos Manuel de C乶pedes)가 노예를 풀어주고 군대를 조직하여 섬 동쪽 끝에서 세력을 펼친 곳이다. 이 곳은 흥미로운 사적지가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는 호세 마르띠가 총을 맞은 곳이 있으며 쿠바에서 가장 훌륭한 국립 공원인 그란 빠르께 나시오날 시에라 마에스트라(Gran Parque Nacional Sierra Maestra)도 바야모 마을의 남쪽에 있다. 바야모는 유쾌하고 한적한 분위기로 별로 관광객이 많지 않다. 마을은 긴 대리석 벤치와 함께 세스뻬데스와 뻬루쵸 피구에레도(Perucho Figueredo, 세스뻬데스의 혁명과 같은 시기인 1868년 쿠바 국가를 작곡한 사람)의 동상을 포함한 유쾌하고 그늘진 세스뻬데스 공원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공원 북쪽에 있는 아윤따미엔또(Ayuntamiento)는 1868년 세스뻬데스가 쿠바의 독립을 외친 곳이다.
  • 이슬라 데 라 후벤뚜드(Isla de la Juventud)
  • 비록 카나레오스(Canarreos) 군도에 350개의 섬이 있지만 이슬라 데 라 후벤뚜드는 이중에서도 가장 큰 섬으로 섬의 수도인 누에바 헤로나(Nueva Gerona)는 이 지역의 행정을 담당한다. 섬의 대부분은 편평하며 시에나가 데 라니에르(Ci輹aga de Lanier)는 쿠바에서 두 번째로 큰 습지이다. 이슬라 데 라 후벤뚜드 지역은 쿠바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지역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섬 북쪽에 살고 있다. 한때 앵무새섬으로도 알려진 이 섬은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존 호킨스(John Hawkins), 토마스 배스커빌(Thomas Baskerville), 헨리 모건(Henry Morgan) 같은 해적들의 은신처였으며 이러한 것들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의 '보물섬'에 영감을 주었다. 이 지역 경제는 가축 목장이나 포도 농장으로 바뀌었으며 서두르지 않는 생활 방식이나 더럽혀지지 않은 자연은 가장 큰 매력거리이다. 배든 비행기든 이슬라 데 라 후벤뚜드에 가는 것 자체가 다소 어려운 일이다. 뿐따 델 에스떼(Punta del Este)에는 인디언 동굴 벽화가 있으며 뿐따 프란세스(Punta Frances)의 해적 해안 절벽을 따라서는 스쿠버 다이빙에 좋은 장소들이 있다. 그리고 섬 동쪽의 산호초들에는 거북이와 이구아나, 그리고 펠리컨들이 인간 군상들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살고 있다.
  • 레저스포츠
  • 쿠바 섬에는 아주 멋진 하이킹이나 트레킹 코스들이 있으며 알또 델 나란호(Alto del Naranjo)에서 쿠바의 가장 높은 산인 투르끼노(Turquino)봉을 통과하여 라스 쿠에바스(Las Cuevas)까지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지나는 3일짜리 트레킹은 힘이 넘쳐나는 많은 여행자들에게 좋은 운동이 될 것이다. 길 표시가 제대로 된 길이나 지도, 전문적인 가이드는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현지 주민들은 보통 몇 달러만 주만 가이드를 해준다. 승마도 관광객에게 인기가 있는데 바코나오(Baconao)와 트리니다드에는 특별히 관광객을 위한 목장도 마련되어 있다. 북동쪽으로 향하는 무역풍은 12월에서 4월까지 윈드 서핑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지만 현지에는 빌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자신의 보드를 가져가야 한다. 쿠바는 천혜의 스쿠버다이빙 지역들을 가지고 있어 전국적으로 30여 남짓의 다이빙 센터에서는 계획된 다이빙이나 코스, 빌릴 수 있는 장비 등을 제공한다. 심해 낚시도 쿠바에서 인기 있다.
  • 쿠바로 가는 길
  • 거의 모든 여행자들은 항공편을 이용해 캐나다, 카리브해 국가들, 중남미 국가들, 그리고 유럽 등지에서 들어온다. 미국에서 출발하는 직항편도 있지만 미국 시민은 미 재무성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이로 인해 쿠바로의 여행은 저널리스트나 연구원, 소수의 다른 그룹들로 제한된다. 쿠바에 대한 미국의 제재로 인해 쿠바 항구에 정박하는 배들은 아주 적으며 따라서 쿠바로 향하는 정기 여객선은 없다. 개인 요트들은 정기적으로 쿠바에 있는 많은 항구나 정박장으로 들어간다.
  • 국내 교통편
  • 쿠바는 모든 지역 중심지들을 연결하는 광범위한 국내 항공 노선을 가지고 있으며 국내 비행기 요금은 그리 비싸지 않다. 대부분의 국내선은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로 국제선 비행기표와 함께 예약할 경우 25% 싸진다. 1991년이래 장거리 버스는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해 현재는 표를 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 직접 가서 사야 하며 출발 2시간 전에 다시 직접 재확인해야 한다. 기차 여행으로 가능한 경우도 많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버스로만 갈 수 있는 중요한 노선들이 있다. 몇몇 모험적인 지방 사업자들이 커다란 트럭을 개조해(카미오네스) 대중 교통수단으로 만들어 많이 지나다니는 버스 노선을 따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1992년 자메이카에서 철도 운행을 정지한 이후 쿠바는 현재 유일하게 철도를 운행하는 카리브해 국가가 되었다. 기차는 지방 수도들 모두를 연결하며 쿠바를 돌아다니기에 버스보다 믿을만하며 훨씬 덜 엎치락뒤치락 하는 교통수단이다. 표는 쉽게 살 수 있으며 쿠바의 열차 여행은 편하면서 생기 있게 국토를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쿠바는 중남미에서 가장 넓은 도로망을 자랑하며 렌터카를 운전하는 것이 아마 가장 쉽게 국내를 돌아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렌터카는 여러 군데에서 고를 수 있다). 많은 쿠바인들은 교통 방편으로 히치하이크를 많이 하며 현지에서는 이런 것을 아세르 보떼이야(hacer botella, 문자 그대로 손으로 '병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한다. 정부 차량은 법적으로 자리가 있는 경우 히치하이킹하는 사람을 태워야 하며 가끔 시 외곽으로 나가는 도로나 커다란 교차로에는 노란색 옷을 입은 공무원이 차를 얻어 타려는 쿠바인들을 위해 판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