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고도(古都)

‘중국의 현대를 보려면 상하이를, 중국의 근대 오백 년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을, 오천 년 중국 역사를 보려면 산시성(陝西省)으로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산시성은 중국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는 지역입니다. 그 중 산시성의 성도인 서안은 중국을 통틀어 가장

많은 볼거리를 간직한 도시로 서안의 문화재 대부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명나라 전까지 장안으로 불렸던 서안은 주, 진, 전한, 수, 당나라 등 수많은 왕조의 수도로 천 년이 넘는 동안 중국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당나라 때에는 동서 9.5km, 남북 8.5km의 도시 규모에 인구가 백만 명이 넘는 거대 도시로 로마와 함께 세계의 중심지로 우뚝 섰습니다.
하지만 당나라의 쇠퇴와 잦은 병란으로 장안의 그 화려했던 번영도 막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서안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실크로드의 기점이라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유럽의 대상들이 비단을 사기 위해 파미르 고원을 넘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했으며, 이곳을 출발해 중국인들이 유럽으로 갔기에 사실상 서안은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되는 도시였습니다.

옛 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시가지

서안은 꽤 큰 도시이지만 도시 구획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편리하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관광지가 몰려 있는 구시가지는 옛 당나라 시절에 만들었던 성 안에 밀집되어 있고, 진시황 병마용과 양귀비가 목욕하던 곳으로 유명한 화청지 등은 시내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시내에서 돌아봐야 할 곳으로는 종루와 고루, 옛 성벽, 비림 박물관, 소안탑과 대안탑 등이 있습니다. 이 중 옛 장안의 흔적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곳이 성벽입니다. 서안의 성벽은 현존하는 중국 고대 성벽 중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편으로 명나라 때인 14세기에 당나라의 장안 성을 기초로 만든 것입니다. 자은사는 당 고종이 647년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원으로 높이 64m의 대안탑으로 유명합니다. 이 탑은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이 세운 것으로 처음에 5층으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10층으로 바뀌었고, 다시 7층 탑으로 바뀌었습니다. 탑 내부에는 현장이 가져 온 불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밖에 중국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섬서 역사 박물관을 들려보기를 권합니다. 이곳은 중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박물관으로 선사시대 석기부터 연대 별로 주, 진, 한, 위진남북조, 수, 당, 송, 원, 명, 청에 이르기까지 37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어 중국의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 고종이 건립한 대안 탑
 
    ▶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으로 손꼽히는 진시황 병마용
   

죽은 자를 위한 지하 호위 군단, 진시황 병마용

서안 시내 만으로도 방문할 가치가 충분하지만 여행자들이 서안을 찾는 가장 큰 목적은 아마도 진시황의 병마용을 보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병마용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 중 하나입니다. 폭군으로 알려졌던 진시황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유적 두 곳은 남겼는데, 만리장성과 병마용입니다. 병마용은 진시황의 무덤과 함께 그가 건설한 지하 궁전의 일부입니다. 병마용은 모두 1, 2, 3호 갱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하나 하나에 실물 크기의 병사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1호갱은 병마용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발굴 상태가 좋은 곳으로 6천여 점의 토용과 말, 목조 전차가 놓여 있습니다. 1호갱은 전차와 보병을 혼합해 놓은 군진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갑옷을 입은 수천 명의 병사들이 금방이라도 출진할 듯한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2호갱은 보병과 기병, 천차대가 혼합 편성된 군진으로 1호갱에 비해 규모도 작고 발굴 상태도 떨어집니다. 2호갱의 최전방에는 330명의 궁노수가 배치되어 있고, 두 번째 작은 진은 64대의 전차로 구성된 전차대로 곡형진의 우측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런 배치를 보아 1호갱이 주력 부대였다면 2호갱은 기동부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3호갱의 가장 규모가 작고 병마용의 숫자도 적지만 그 역할은 가장 중요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 2호갱의 토용이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는 것에 비해 3호갱의 토용은 의장용 병기인 동수를 들고 얼굴을 마주본 채, 통로 양쪽에 정렬해 있습니다. 이로 보아 3호갱의 토용은 지휘부관을 호위하는 경비부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3호갱은 지휘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병마용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진시황의 무덤이 있으나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아서 산처럼 보일 뿐, 아무 것도 볼 수 가 없습니다. 진시황의 무덤과 병마용은 서안 동북쪽으로 37km 떨어진 곳에 있어서 차로 1시간 정도 가야 합니다.

  ▶ 당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던 곳인 화청지

Photo by Sunkyeom Kim  

당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의 밀어를 나누던 곳, 화청지

진시황 병마용에서 몇 km 정도 떨어진 여산 기슭에 화청지가 있습니다. 화청지는 산세가 아름답고 목욕하기에 적당한 43도의 온천수가 풍부하게 나와 주나라 때부터 황제의 휴양지로 이용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화청지가 유명세를 떨치게 된 이유는 당나라 현종과 오늘날 미인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매년 10월에 이곳에 와서 봄까지 지냈다고 합니다. 당나라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현종은 말년에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하고 화청지에서 향락에 빠져 지냅니다. 나랏일을 하지 않고 향락에 빠져든 왕들의 말로는 뻔 한 일. 결국 756년 안사의 난이 일어났고, 피신 중이던 양귀비는 불만에 찬 호위 무사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현재 화청지는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으며, 현종과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목욕탕과 각종 전각 등이 있습니다. 연못에는 사서에 기록된 양귀비의 모습을 본뜬 양귀비상이 있어서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글·사진 김선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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