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락 데 슈발리에

중동에서 유일하게 한국과 수교하지 않은 국가인 시리아. 그 동안 이 나라를 찾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고대 문화유산의 보고인 시리아의 진면목이 알려지면서 이 나라를 찾는 여행자들이 점차 늘고 있다. 시리아 서부, 테르 카라흐 마을의 북쪽 18km 떨어진 산에 홀연히 서 있는 크락 데 슈발리에는 매우 견고한 성채로 팔미라와 더불어 시리아 최고의 여행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십자군 성채

11세기에서 13세기말까지 이어진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중동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참화에 휩싸여 있었다. 십자군과 이슬람 세력이 서로 뺐고 빼앗기며, 벌였던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중동 전역에는 많은 성들이 세워졌다.
특히 멀리 유럽에서 원정을 해야 했던 십자군은 군사적 요지에 50여 개에 달하는 성을 건설하였다. 이 성들은 치열한 전쟁, 또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세월이라는 화살에 맞아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폐허의 유적으로 남겨져 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살아남는 사람이 있듯이 이들 성채 중에도 아직까지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 있다.
십자군이 건설한 많은 성채 중 유일하게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곳은 '크락 데 슈발리에'로 시리아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을 정도로 그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아랍어로 '기사의 성'이란 뜻의 이 성은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이슬람을 지켜내서 ‘이슬람의 수호자’로 불리는 살라딘 조차도 이 성을 공략하지 못했으니 이 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은 채, 800년간 이곳을 지켜온 크락 데 슈발리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십자군 성채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 좀처럼 공략하기 힘든 이중의 성벽으로 이루어진 크락 데 슈발리에

Photo by Sunkyeon Kim  

요하네스 기사단의 본거지였던 웅장한 성채

1096년에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제1차 원정대가 예루살렘 함락시키면서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는 듯했다. 하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점령했던 성들을 다시 이슬람에 내주고, 결국은 예루살렘까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유럽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 원정 와서 벌어야 했던 십자군 전쟁은 처음부터 유럽 국가들에게는 무리였다. 병력의 수는 물론이고, 현지 지형에도 익숙하지도 않고, 보급도 어려웠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기기 힘든 전쟁이었다. 게다가 전쟁의 성격 또한 종교적인 것뿐만 아니라 유럽 내부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들이 결합되어 있어서 십자군끼리의 결속 또한 그리 강하지 않았다. 하여튼 무려 200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친 원정전쟁을 벌이는 동안 십자군은 보급과 방어, 공격 등의 전진기지 역할을 할 성채를 곳곳에 설치했다. 크락 데 슈발리에 또한 이 많은 성들 중의 하나였다.

크락 데 슈발리에는 원래 1031에 시리아 중서부의 거점 도시인 홈스(Homes)의 군주에 의해 내부 성이 건설되었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1100년 십자군이 세운 안티오크 공국이 이 성을 점령하였다가 다시 1142년 십자군의 일원인 요하네스 기사단의 차지가 되었다. 요하네스 기사단은 원래 있던 작은 성에 외성 쌓는 확장공사를 한 끝에 1170년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완공하였다. 크락 데 슈발리에는 성채의 구조와 축성법, 그리고 건축미가 매우 뛰어나서 오늘날 중세 유럽의 건축사를 연구하는데 빼 놓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 육중한 돌로 만들어진 크락 데 슈발리에의 내부

Photo by Sunkyeon Kim  

그 누구도 함락시기기 힘들었던 견고한 성채

이슬람의 요충도시인 홈스와 지중해를 잇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는데다 좀처럼 공략하기 힘들었던 이 성을 두고 어떤 역사가는 “크락 데 슈발리에는 이슬람 세계의 목에 박힌 가시”라고 말했다. 크락 데 슈발리에는 그 크기가 남북이 200m, 동서가 140m나 되며, 면적만 해도 1만평에 이르는 대규모이다. 이 성채의 가장 큰 특징은 완벽한 이중 구조의 성벽인데, 먼저 13개의 망루가 있는 든든한 외성이 있고, 그 안에 외성보다 훨씬 높게 쌓아 올린 내성이 성채를 둘러싸고 있다.

내성과 외성 사이에는 도랑을 깊게 파고, 물을 가득 채워 물 엉덩이를 만든 해자가 있어서 외성이 함락되더라도 내성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또한 내성을 화살을 쏘기 좋게 45도 경사로 만들었기 때문에 외성을 함락시키더라도 내성에서 쏟아지는 화살세례를 피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성채 내부에는 채플과 곡식저장소, 거대한 물 저장소, 마구간, 식당, 회합장소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도저히 함락시키기 힘들 것 같은 난공불락의 이 요새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아라비아 반도 전역을 점령할 당시의 술탄인 베이발스(Sultan Baybars)에 의해 1271년에 함락되고 말았다.
당시 술탄은 한달 간의 격전 끝에 외성을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내성은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

결국 군사적으로 크락 데 슈발리에를 함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술탄은 한 가지 계략으로 이 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술탄 베이발스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십자군들에게 거짓으로 된 한 통의 비밀 서신을 전달하였다. 그 밀서는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유럽으로 철군하라는 십자군 총 사령관의 명령이 담겨 있었다. 결국 이 밀서의 내용을 믿은 십자군은 유럽으로 돌아가는 안전을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항복을 하였다. 이 성의 함락은 사실상 십자군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가장 견고했던 크락 데 슈발리에가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가자 나머지 성들도 추풍낙엽처럼 함락되었다. 1291년 십자군 최후의 보루였던 아코(acco) 성이 함락되면서 200년에 걸쳐 벌어졌던 기나긴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의 승리로 그 끝을 맺게 되었다.

  ▶ 현존하는 십자군 성채 중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크락 데 슈발리에 성채

Photo by Sunkyeon Kim  

글·사진 김선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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