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India)

문화적 선입견에서 벗어나려 열심히 노력하고 화장실에서 휴지를 쓰는 기쁨을 포기한다 해도, 인도는 여전히 그 규모와 떠들썩함, 다양함으로 우리를 스쳐 지나고 만다. 인도에서는 이쪽의 기대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없고,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기대하지 않은 일이 다양한 형태로 닥쳐와 항상 옆에 앉아있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인도 여행은 많은 여행자들에게 일종의 테스트 같은 것으로, 몇몇 여행자들은 비행기에 올라타 그 지긋지긋한 나라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한다. 그러나 복잡한 우주론을 탐구하는 것을 즐기고 지나치게 육욕적인 생활을 사는 보람으로 삼고 부조리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라면, 인도는 지구상에 전개되는 중 가장 복잡하고 체험해 볼만한 드라마를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통계 자료

국명 : 인디아 공화국(Republic of India)
면적 : 3,287,000 sq km (1,281,900 sq m) (분쟁이 잦은 국제 국경지역)
인구 : 약 11억 6천만 명(2009년 추정치)
수도 : 뉴델리(New Delhi, 인구 1010만)
인종 : 인도-아리안 족 72%, 드라비다 족 25%, 몽고족 3%
언어 : 힌두어 및 영어, 그 외 15가지의 주요 언어와 700가지 이상의 방언이 있음
종교 : 힌두교 82%, 이슬람교 11%, 기독교 2% 시크교 0.7% 불교 0.7% 자이나교 0.7
정체 : 대통령제(Pratibha Pati, 2007년 7월 취임)

역사

인도 최초의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 인더스 강 계곡에서 1000년가량 전성기를 누렸다. 대도시였던 모헨조다로(Mohenjodaro)와 하라파(Harappa)(현재의 파키스탄 지역에 위치)에서는 사제를 지배계급으로 하는 복잡한 문명이 꽃피고 힌두교의 기본 원리가 형성되었다. 기원전 1500년에서 200년 사이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아리아족 전사들이 인도 남부를 휩쓸면서 현재의 마드야 프라데쉬(Madhya Pradesh) 지역에 있는 빈드야(Vindhya) 고지 지역까지의 남부 인도를 확실히 장악했다. 그들은 드라비다인(Dravidian) 원주민들을 남쪽으로 밀어내었다. 침입자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를 비롯해 소를 키우고 고기를 먹는 전통을 가지고 들어왔지만, 기원전 8세기가 되자 어느 정도는 동화되어 승려 계급은 다시 우월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는 카스트 제도 속에서 강화되었고 이 계급질서는 브라만 승려들의 지위를 보장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엄격한 규칙에 의해 유지되었다.
기원전 500년경 불교가 일어났고 카스트 제도를 비난함으로써 브라만 힌두교에 강력하게 도전했다. 불교가 힌두교를 강력하게 밀어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황제에 의해 수용되면서였는데, 무굴 제국이 성립되기까지 이후의 그 어떤 지배자도 아소카 황제만큼 인도 전역을 통제하지 못했다. 마우리아 왕조의 멸망 이후 많은 제국이 일어나고 무너졌지만 그중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나라는 굽타(Gupta) 제국으로 기원후 4세기에서 606년까지 지속되었다.
굽타 제국 시기는 시, 문학, 예술의 황금기로 아잔타(Ajanta), 엘로라(Ellora), 산치(Sanchi),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예술 작품 중 많은 부분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힌두교는 다시 부흥했고 불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훈족(Huns)의 침입은 굽타 왕조의 종말을 알렸고 인도 북부는 많은 힌두교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이 왕국들은 이슬람교도들이 들어올 때까지 다시 통일되지 못했다. 인도 최남부는 북쪽 왕국들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이 지역의 힌두교는 불교나 자이나교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 남부의 번영은 이집트, 로마, 남동 아시아와의 오랜 교역 유대에 기반한 것이었다. 남부에서 일어난 대제국으로는 판드라스(Pandyas), 체라스(Cheras), 차루카스(Chalukyas), 팔라바스(Pallavas), 촐라스(Cholas) 등이 있다. 힌두 왕국이 남부를 지배하고 북부에서 불교가 수그러드는 동안 중동의 이슬람 세력이 서서히 인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1192년 이슬람 세력은 영구적인 기반을 마련했고 이후 20년이 흐르는 동안 갠지즈 분지 전체가 이슬람 세력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델리의 이슬람 술탄 왕조는 내분이 심했고, 이슬람 세력은 남부를 손아귀에 넣는 데는 실패했다. 이 지역은 기원후 1000년에서 1300년까지 호이살라(Hoysala)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현재의 카르나타카(Karnataka) 지역에서 두 대제국이 발달했는데, 하나는 햄피(Hampi)에 아름다운 수도를 건설했던 강력한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라(Vijayanagar) 왕조였고 다른 하나는 각각 베라(Berar), 아흐메드나가르(Ahmednagar), 비자푸르(Bijapur), 골콘다(Golconda), 아흐메다바드(Ahmedabad)에 중심지를 둔 다섯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던 바흐마니(Bahmani) 이슬람 왕국이었다. 무굴 황제들은 인도 역사의 거인들이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펀잡(Punjab)으로 진군해 와 1525년 파니팻(Panipat)에서 델리 술탄들을 패배시키고 건축, 예술, 문학의 또 다른 황금시대를 열었다. 무굴 제국은 빠른 속도로 권력을 잡았지만, 그 쇠퇴 역시 빨라서 사실상 여섯 명의 위대한 황제가 있었을 뿐이다.
낮은 카스트 출신이었던 시바지(Shivaji)의 영웅적인 업적 덕분에, 17세기 동안 마라타(Maratha) 제국이 성장했고 서서히 무굴 제국의 영역 대부분을 차지했다. 마라타 제국은 최후의 대 제국 세력이었던 영국에게 패배할 때까지 중앙 인도의 통제권을 굳게 쥐고 있었다. 인도에서의 영국 세력은 처음에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행사되었는데 이 회사는 1612년 구자라트(Gujarat)의 수라트(Surat)에 무역 거점을 확보했다. 영국은 17세기에 인도에 손을 뻗쳤던 첫번째 유럽 국가도, 유일한 유럽 국가도 아니었다. (무굴 제국이 인도를 점령하기도 전인) 1510년 이후 포르투갈은 고아(Goa)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역시 무역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다. 영국의 세력은 클라이브(Clive)가 캘커타를 다시 확보했던 1757년에서 영국이 제 4차 마이소르(Mysore) 전투에서 승리한 1799년 사이 점차 확대되었다. 마라타 제국과 영국사이의 긴 싸움은 결국 1803년에 마무리 지어졌고, 인도의 거의 모든 지역이 동인도회사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영국은 인도를 주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장소로 생각했고, 인도의 문화, 신앙, 종교는 손대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영국인들은 철광과 석탄 광산을 확장하고 차, 커피, 목화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발전시켰으며 인도의 광대한 철도 노선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영국인들은 부재지주 제도를 장려했는데, 부재지주제가 운영과 징세의 부담을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가난하고 소유 토지가 없는 농민들이 양산되었고 이 문제는 오늘날도 비하르(Bihar)와 서부 벵갈 지역에서 만성적인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1857년 북인도에서 일어난 인도 폭동은 동인도 회사의 소멸이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인도의 관리는 뒤늦게 영국 정부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다. 다음 50년은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황금기였다. 영국 통치에 대한 저항은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인도에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해주기 위해 설립된 의회가 이제 진정한 자치를 위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의회 밖에서는 피 끓는 개인들이 보다 폭력적인 수단으로 독립을 추구해나갔다.
결국 영국은 캐나다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위한 방침을 세워준 셈이 되었다. 1915년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은 간디가 돌아왔고 자신의 능력을 독립 문제에 집중시키면서 사티야그라하(satyagraha)라 불렸던, 영국의 지배에 대한 소극적 저항 정책을 채택했다. 2차 대전은 식민주의와 유럽의 우월성 신화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인도의 독립은 필연적인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인도 내에서 그 수가 많았던 이슬람 소수민족들이 독립 인도는 힌두교 중심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지방 선거는 지방 자치주의가 위험하리만큼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무하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가 이끄는 이슬람 연맹은 압도적 다수의 이슬람교도들을 대변하고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가 이끄는 의회 정당은 힌두교도 국민을 대변하는 상황이 되었다. 분리된 이슬람 국가를 이끄는 권력을 원했던 진나의 독선적인 시도는 영국이 독립을 허락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임이 분명해졌다. 정치적 냉전과 급증하는 긴장 속에서 총독 루이스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 경은 어쩔 수 없이 인도를 분할하는 결정을 내리고 독립을 위한 신속한 예정표를 마련했다. 불행히도 이슬람교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두 지역은 서로 동떨어진 반대지역에 있었다. 이는 새로운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이 적대적인 인도로 가로막힌 동부와 서부 양쪽으로 나뉘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경선이 발표되자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엑서더스가 일어나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으로,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는 인도로 자리를 옮겼다. 이러한 이주는 대부분 야만적인 폭력 행위를 수반했다. 이 혼란 속에서 1000만 이상의 사람들이 거주지를 옮겼고 아무리 적게 잡아도 250,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독립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또 한 차례의 비극이 있었다. 1948년 1월 30일, 분리와 그에 뒤따른 유혈 사태로 인해 깊은 낙담에 빠져 있던 간디가 힌두교도 광신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분리의 상처에 뒤이어, 인도의 초대 수상이었던 자와할랄 네루는 비종교적 정치 체제, 사회주의 중심의 정치 계획, 엄격한 비동맹 정책을 옹호했다. 인도가 일반적으로 이전의 식민통치 모국과 충성 관계를 계속 유지했고 영연방에 참가하는 쪽에 투표하기는 했지만, 이는 사실상 구 소련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중국과의 갈등 때문이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철천지원수인 파키스탄에 미국이 원조를 해 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는데, 파키스탄은 이슬람교도가 많은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요구로 인해 인도에 특히 적대적이었던 것이다. 1965년과 1971년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에는 무력 충돌이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카슈미르 문제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 때문이었다. 인도의 다음 수상은 네루의 딸이었던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로 1966년 선출되었다. 인디라 간디는 여전히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녀가 1975년 국가 계엄령을 선언함으로써 인도가 민주적 기반을 갖추는 것에 쓸데없이 개입했다고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간디 여사는 1984년 자신의 시크교도 보디가드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이는 암리차(Amritsar) 황금 사원에서 시크 과격파들을 몰아내기 위해 인도 군대를 동원하기로 한 그녀의 부적절한 결정에 대한 보복이었다. 간디 왕조의 인도 정치 장악은 인디라 간디의 아들로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인도 항공 조종사였던 라지브(Rajiv)가 권력을 향해 다가가면서 계속되었다. 라지브는 인도에 새롭고 실용적인 정책을 도입했다. 외국인 투자와 현대 기술의 이용이 장려되었고 수출 제한이 완화되었으며 많은 새로운 산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확실히 인도를 1990년대로 끌어올렸고, 부분적으로는 스스로 자처한 것이었던 고립주의로부터 인도를 깨어나게 했다. 그러나 이는 인도의 거대한 농촌 지역에는 거의 자극을 주지 못했다. 라지브는 타밀나두(Tamil Nadu)로의 선거 여행 동안 스리랑카의 타밀 타이거즈(Tamil Tigers) 지지자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모친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라지브 간디 이후 인도에는 세 명의 지도자가 있었고 그들 모두가 인도를 계속 끌고 나가 세계 경제 속으로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인도에서의 지방 자치주의의 위험은 1992년 힌두교도 폭도들이 날뛰며 라마의 탄생지에 지어졌다고 그들이 믿었던 모스크를 파괴한 아요다(Ayodhya) 소요 동안 명백하게 드러났다. 힌두교도 민족주의자들 중심의 브하라티야 자나타 당(Bharatiya Janata Party, BJP)은 이러한 기회를 민첩하게 이용하고자 했다. 인도 국민의회파(Congress party)의 타락은 비종교적이고 관용적인 인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믿을만한 정치적 대안을 내놓는 것에 장애가 되었다. BJP는 가능할 것 같지 않던 소규모 정당들의 제휴로 인해 권력에서 밀려났는데, 이 제휴는 연합 전선(United Front, 그러나 13인의 패배자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국민의회파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1997년 11월, 국민의회는 후원을 철회했고 로크 사바(Lok Sabha)는 해체되어 1998년 2월에는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에서는 BJP가 이끄는 제휴세력이 승리했고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Atal Bihari Vajpayee)는 두 번째로 수상이 되었다. 지방자치주의적인 정치 성향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BJP의 전통적인 힌두교 입장은 현대적인 외부 세계의 영향이 급속히 밀어닥치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투표자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이다. 힌두어로 더빙되고 인공위성을 통해 인도로 송출되는 "119 해양구조대"를 보면 인도인들이 우려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BJP의 극단적인 정책은 다양한 위치의 정치적 동맹자들에 의해 완화될 것이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대가 잘못되었음이 증명된 것은 BJP가 인도는 선거이후 몇 주안에 핵무기를 가지게 될 것이라던 공약을 실제로 실천에 옮겼을 때였다. 국제적인 분노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는 핵무기 실험이 대규모의 축제와 함께 치러졌고 이는 BJP 지지자들이 늘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일주일도 긴 기간이라는 금언을 증명하듯 1999년 4월 바즈파이는 의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잃었고 불신임 투표에 회부되어 한 표 차이로 패배했다. 라지브 간디의 미망인인 소니아 간디(Sonia Ghandi)가 정치 변방에서 3년을 보낸 국민의회파를 승리로 이끌어 간디 정치 왕조를 재건할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그러나 인도 의회의 당파와 분열로 인해 소니아는 다수 의석을 차지할 만한 정치적 동맹을 이루어내지 못했고 인도는 다른 때처럼 세 번째 선거를 치뤄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여당인 브하라티야 자나타 당(BJP)이 다시 정권을 쥐었지만 현격하게 지지도가 떨어졌고 BJP는 동맹자들에게 더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바즈파이와 BJP는 승리했다기보다는 반대당과 인도 정치라는 괴물에 대한 통제력 상실로 인해 패배한 것이었다. 인도의 선거가 끝나고 며칠 만에 파키스탄에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세계는 바즈파이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를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과거 파키스탄에 대한 그의 강경정책이 대중의 지지를 얻는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았으므로 그는 아마도 자신의 지도력을 검증 받기 위한 무력 행위를 취하고 싶었을 것이다.

경제

국내 총 생산 GDP : US$ 12,175억(2009년 기준)
1인당 국민총생산 GNP : US$ 1,070(2009년 기준)
무역액: US$ 4,654억 달러
주요 산업: 농업(쌀, 밀, 차, 고무), 직물, 석탄, 철강
주요 교역국: 독립국가연합, 미국, 일본, EU

문화

종교는 인도 생활의 모든 면에 스며들어 있다. 비종교적 민주정체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회적, 종교적 구조가 손상되지 않고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며, 이는 침략, 박해, 유럽국가의 식민정책,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4000년 이상 지속되었다. 현대 기술이 사회 구조 속에 점점 스며들면서 불가피하게 변화가 일어났지만, 기본적으로 인도 농촌의 많은 부분은 지난 수천 년 동안과 마찬가지이다. 인도의 사회 및 종교 제도는 그 탄력성으로 급속한 변화 혹은 파괴의 시도를 완화시키고, 무시하고, 뿌리치고 있는 것이다. 힌두교는 인도의 주요 종교로 인구의 약 80%가 힌두교 신자다. 신자의 숫자로 보자면 힌두교는 아시아에서 가장 강성한 종교이며 현존하는 신앙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한다. 힌두교에는 무수한 신이 있으며 성스러운 책도 여러 가지 있다. 힌두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여러 번의 탄생과 부활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영혼의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정한다. 매번 태어날 때마다 사람은 최후의 구원에서 가까워지거나 멀어질 수 있으며, 이를 결정하는 요소는 각자의 카르마(karma, 業)라는 것이다. 힌두교에는 세 가지 기본 관습이 있다. 첫째, 푸자(puja, 예배), 둘째, 죽은 자를 화장하는 것, 셋째, 카스트 제도에 따르는 지배와 규율이다. 사람들이 개종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힌두교는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힌두교도로 태어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기원전 500년경 북인도에서 창시되었고 아소카 황제가 불교를 채택하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지만, 이후 서서히 힌두교에 융합되었다. 오늘날 힌두교는 부처를 힌두교 신 비쉬누(Vishnu)의 또 다른 환생으로 간주하고 있다. 현재 인도에는 660만의 불교도가 있지만 보드가야(Bodhgaya), 사라나스(Sarnath, 바라나시(Varanasi) 근처), 쿠시나가르(Kushiagar, 고락푸르(Gorakhpur) 근처) 같은 북인도의 주요 불교 성지는 중요한 참배 지역으로 남아있다.
자이나교 역시 브라만 중심 힌두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시도로 시작되었다. 자이나교는 불교와 같은 시기, 같은 이유로 나타났던 것이다. 오늘날 자이나교 신도는 450만에 지나지 않고, 주로 인도 서부와 남서부에 몰려 있으며 인도 외의 나라에는 신도가 없다. 자이나교에서는 우주는 무한하며 한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믿는다. 자이나교 역시 부활과 자이나교 예언자의 행로를 따름으로서 가능한 궁극적인 영혼의 구원을 믿는다. 인도에는 1억 이상의 이슬람교도가 있어 지구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 국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교는 이웃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도 가장 유력한 종교이며 자무(Jammu)와 카슈미르(Kashimir)에도 다수의 이슬람교도가 있다. 인도에서 이슬람교의 영향은 특히 건축, 예술, 요리 등의 분야에서 강하다. 인도에는 1800만의 시크(Sikh)교도가 있으며 펀잡 지방에서 그 세력을 떨치고 있다. 시크교는 원래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장점을 모아 가져오려 시도했었다. 기본적인 교리는 힌두교와 유사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시크교는 카스트 차별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시크교의 성전은 암리차에 있는 황금 사원(Golden Temple)이다.
인도는 언어에 있어 바벨탑과 비슷한 세계다. 원래 '인도어'란 존재하지 않았고, 부분적으로는 이로 인해 영국이 인도에서 물러난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영어가 폭넓게 쓰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에 의해 인정된 공용어는 18가지이지만 1991년의 조사에 따르면 1600가지가 넘는 소수 언어와 방언이 있었다. 많은 국경선이 언어에 따라 정해졌기 때문에, 언어는 매우 정치적으로 논란이 많은 문제이다. 힌디어를 국어로 정하고 점차적으로 영어를 몰아내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이 계획의 문젯거리는 힌디어가 북부에서는 우세한 언어지만 남부의 드라비다계 언어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남부에서는 힌디어로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인도의 상류계급은 교육받은 엘리트들의 언어이며 지위의 상징으로 자랑할 수 있고 국제 비즈니스의 세계로의 입장권이기도 한 영어에 집착한다. 사실, 인도인의 3%만이 영어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인도 예술은 기본적으로 주제와 발전에 있어 종교적이며 인도 예술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인도 종교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 지식이 필요하다. 고전 인도 무용, 힌두교 사원 건축, 조각(어느 부분이 한 작품의 끝이고 다음 작품의 시작인지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 무굴 제국의 군사 및 도시 건축, 세밀화 그림, 최면술적인 인도 음악 등이 인도 예술의 하이라이트이다. 인도 음악은 관광객들이 즐기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는데, 서구 기준의 화음이라는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밀쳐 둘 필요는 없다. 인도인들은 영화를 사랑하며 봄베이가 중심이 되는 인도의 영화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매력적이다. 만들어지는 영화의 대부분은 세 가지 핵심 요소, 즉 로맨스, 폭력, 음악에 기반을 둔 촌스러운 멜로드라마이다. 거리에 많이 늘어서 있는 괴기스럽게 손으로 그린 길거리의 영화 간판을 보면 영화가 어떤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과 세실 B 드밀 감독의 성서 역사물을 배경으로 람보가 뛰어다닌다고 상상하면 절반쯤은 맞아떨어진다. 인도 영화는 싼 값에 오페라 비슷한 현실 도피를 할 수 있고 귀에는 극도로 자극이 강하며 다시 보고 싶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인들의 믿음과는 달리 모든 힌두교도들이 공식적으로 채식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어디서든 채식주의자를 만날 수 있기는 하지만, 엄격한 채식주의는 남부(이 지역은 고기를 먹는 아리아족과 이슬람교도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와 구자라티(Gujarati) 지역에서 가장 강성하다. 기후 조건과 역사적 영향으로 인해 북부와 남부 사이에는 상당한 지역적 차이가 있다. 북부에서는 고기를 훨씬 많이 먹고 음식도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의 요리와 비슷한 "무굴 스타일"인 경우가 많다. 향신료에 중점을 두고 매운 맛은 덜하며 곡류와 빵이 쌀보다 인기 있다. 남부에서는 쌀을 더 많이 먹고 채식주의 요리가 더 많으며 카레는 더 맵다. 남부 채식주의 요리의 또다른 특징은 먹는데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냥 손가락으로 음식을 뜨면 되지만, 왼손은 사용하지 않는다.

축제 및 행사

인도에는 수많은 축제가 있고 그 중에는 아주 볼 만 해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보러 가지 않는다면 바보짓이라고 할 만한 축제도 많다. 매해 첫 축제는 1월 델리에서 열리는 비종교적 리퍼블릭 데이(Republic Day) 축제로 코끼리와 행진, 군대 퍼레이드가 있고 인도 왕가의 화려함이 넘친다. 2월의 홀리(Holi)는 북인도에서 가장 화려한 힌두 축제 중 하나다. 이 축제는 겨울의 끝을 알리며 하루 동안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색깔 있는 물과 붉은 가루를 뒤집어씌우는 전통이 있다.
10일간 계속되는 시테 무하람(Shi'ite Muharram) 축제는 모하멧의 손자의 순교를 기리는 것이다. 이 축제 기간 동안은 대규모 퍼레이드가 있고 헌신적인 회개자들이 종교적인 열정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이런 광경은 인도의 중요한 시테 도시인 러크노우(Lucknow)에서 가장 잘 볼 수 있고, 매 2년마다 4/5월에 열린다. 대규모의 쿰브 멜라(Kumbh Mela) 축제는 신들과 악마들이 주전자(kumbh)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던 고대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전투 동안 주전자에서 신의 술 네 방울이 흘러 알라하바드(Allahabad), 하리드와르(Haridwar), 나식(Nasik), 우자인(Ujjain)에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멜라는 3년마다 이 네 도시에서 돌아가면서 열린다. 지난번 멜라는 1998년 2월 1일에서 5월 11일까지 하리드와르에서 열렸다.라스 야트라(Rath Yatra) 자동차 대축제를 자동차 경주와 혼동하지 않도록 하라. 6/7월에 퓨리(Puri)에서 벌어지는 이 장관은 자가나스(Jagannath) 신이 거대한 신전 자동차를 타고 연례행사인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수천명의 열광적인 신자들이 뒤를 따른다. 케랄라(Kerala)의 대규모 연례행사 중 하나는 네루 컵 스네이크 보트 경기(Nehru Cup Snake Boat Races)로, 알라푸자(Alappuzha, Alleppey) 강에서 8월 둘째 주 토요일에 벌어진다. 8/9월에 열리는 가네쉬 차투르티(Ganesh Chaturthi) 축제는 코끼리 머리를 한 인기 있는 가네쉬 신을 찬양하는 축제이다. 이 축제는 대규모로 열리지만 특히 마하라시타(Maharashtra)에서 열광적이다.
신전이 세워지고, 폭죽이 터지고, 진흙 인형이 강이나 바다에 담궈지고 사람들은 모두 달을 쳐다보는 것을 피한다. 9/10월은 쿨루(Kullu)에서의 즐거운 신들의 축제를 보기 위해 언덕으로 향하는 때이다. 이는 두세흐라(Dussehra)의 일부로, 마이소르와 아흐메다바드에서 제일 볼 만 하다. 11월은 라자스탄의 푸쉬카르(Pushkar)에서 거대하고 화려한 낙타 축제(Camel Festival)가 열리는 때이다. 디왈리(Diwali, 혹은 디파발리(Deepavali))는 힌두교 달력에서 제일 행복한 축제로 11월에 5일간 행사가 열린다. 많은 신들에게 경배하기 위한 과자, 기름 램프, 폭죽 등이 이 축제의 중요한 부분이다. 싫증나는 구닥다리 장면일지도 모르지만, 고아의 해변 파티는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위한 유일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여행자 정보

비자: 인도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비자가 있어야 한다. 인도비자는 단수비자와 복수비자로 나뉘는데, 복수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영어로 인도에서의 구체적인 일정을 기록해서 제출해야 한다. 2012년 3월 현재 인도비자는 인도대사관에서 직접 발급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도대사관에서 의뢰한 비엘에스서비스 코리아라는 대행기관을 통해서 받아야 한다. 비자발급에는 보통 2일 정도가 소요된다. 비자발급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비엘에스서비스 코리아의 웹사이트 http://www.blsindiavisa.kr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건강상 위험: 콜레라, 뎅그열, 이질, 간염, 말라리아, 뇌막염(트레킹 지역에 한정), 장티푸스. 인디아의 대도시 대부분은 오염이 심하며 호흡기 만성질환이 있는 여행자는 미리 예방조치를 해야 한다.
시간대: 협정 세계시에 5시간 30분이 더해짐.
전기: 230-240V, 50 Hz
도량형: 미터법(도량형 환산표)
관광산업: 일 년에 200만의 관광객이 방문

경비 및 환전

통화 : 인도 루피(India rupee)
환전: 인도로 입국할 때 인도 화폐를 가지고 들어가거나 출국할 때 가지고 나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루피는 충분히 환전할 수 있으며 암시장이 많지는 않지만 "돈을 바꾸시라"는 제의에 계속 시달리게 될 것이다. 인도를 여행할 때는 미국달러를 준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도시에서는 어렵지 않게 환전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환전하기가 쉽지 않으니 작은 도시를 여행할 계획이라면 미리 충분히 환전을 해두는 것이 좋다. 인도에서는 여행자 수표의 환율이 현금에 비해 더 좋으니 굳이 미국달러를 현금으로만 준비할 필요는 없다. 분실과 도난을 대비해서 일정액을 토마스쿡이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여행자수표로 바꿔가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신용카드는 인도의 도시와 큰 마을에서 널리 사용되고 특히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다이너스 클럽, 마스터카드, 비자 등이 많이 쓰인다. 신용카드를 이용해 루피로 현금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바로다(Baroda) 은행은 이런 거래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가장 효율적이다. 인도 지폐는 서구에서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유통되고 특히 소액 지폐는 매우 더럽다. 정부가 위생상 경고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찢어지거나 더러운 지폐로 돈을 내려고 하면 상대가 거부하는 일이 종종 있을 것이다. 오래된 지폐는 모든 은행에서 새 지폐로 바꿀 수 있고 저금할 수도 있으며 아니면 좀 더 독창적으로 팁으로 주어버리는 방법도 있다.

일반경비

저렴한 식사: US$2~3 / 중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US$5~7 / 최고급 레스토랑 US$15~20저렴한 숙소: US$5-30(더블) / 중급 호텔: US$20-50 / 최고급 호텔: US$100-200
싼 호텔에 묵고 항상 2등 열차만 타고 달(dhal)과 쌀밥을 먹고 사는데 익숙해진다면 하루에 US$20만 있으면 인도를 여행할 수 있다. 욕실이 있는 소박한 개인실, 다양한 음식, 장거리 이따금 1등 열차를 이용하는 등의 약간 더 편안한 여행을 원한다면 하루에 US$30-50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중급 호텔에 머무르고 꽤 괜찮은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가끔은 기사 딸린 자동차를 빌리려면 하루에 US$70-100정도 예산을 잡는다. 마하라자(maharaja)의 궁전이었던 곳이나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을 지나치고 싶지 않다면 서구를 편안하게 여행하는 경우나 비슷한 비용을 생각하면 된다.

인도에서는 훌륭한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서만이 아니라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 팁을 주게 된다. 적절한 박시시(baksheesh)는 닫힌 문을 열어주고 잃어버린 편지를 찾아주며 다른 작은 기적들도 일으킨다. 여행자용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는 종종 봉사료 10%가 계산서에 붙어서 나온다. 2010년 들어서는 많은 레스토랑이 10%의 봉사료 외에도 정부에서 붙이는 세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서 식사비 외에도 20%가 넘는 비용이 추가로 나오기도 한다. 물론 길거리의 허름한 식당들을 이용할 때는 봉사료나 별도의 세금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여행 시기

인도의 기후 요소는 워낙 다양해서 날씨를 생각하면 어느 시기가 가장 방문하기 좋다고 확실하게 못 박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10월에서 3월까지가 제일 여행하기 좋은 시기라고 이야기되고 있기는 하다. 남쪽 끝에서는 몬순기후로 인해 1월에서 9월까지가 더 상쾌하고, 시킴(Sikkim)과 북동 인도 지역에서는 3월에서 8월까지가 더 낫다. 카슈미르와 히마칼(Himachal) 프라데쉬의 산악지역은 5월에서 9월까지가 괜찮다. 라자스탄의 사막과 북서 인도 히말라야 지역은 몬순기간 동안이 제일 낫다인도 히말라야의 트레킹 시즌은 대략 4월에서 11월까지이지만, 코스와 고도와 지역에 따라 매우 달라진다. 스키 시즌은 1월에서 3월까지이다. 여행 시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특별한 축제 시기는 축제 및 행사 부분에 나와 있다.

주요 여행지

델리(Delhi)
델리의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며, 특히 인도에 처음 온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방문자들은 이 도시의 매력을 알아채기 전에 오염, 인파, 악취, 소음, 끊이지 않는 말다툼 등을 먼저 보게 된다. 그러나 델리는 참을성을 발휘할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 도시의 매혹적인 역사가 방문자들의 주변에 그대로 흩어져 있다. 파하르간지(Paharganj)의 시장은 인도 배낭여행의 근사한 입문지라 할 수 있다. 델리의 기념물들은 인도에서 건축학적으로 가장 놀라운 건물에 속한다. 음식 역시 근사하다. 델리는 인도의 수도이며 북인도 여행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델리에 머무르면서 아그라(Agra)와 타지마할(Taj Mahal)을 구경하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이며 라자스탄의 색채가 가득한 자이푸르(Jaipur) 역시 다섯 시간도 떨어져 있지 않다. 만약 히말라야를 향해 북으로 가거나 바라나시 산맥을 향해 동으로 갈 생각이라 해도 역시 델리를 지나게 될 가능성이 많다. 이를 갈면서 숨을 참고 델리라는 도시 속으로 돌진해 보라.

아그라(Agra)
사랑을 위해 지어진 가장 사치스러운 건물이라 묘사되는 타지마할(Taj Mahal)은 사실상 인도 관광 산업의 상징이다. 가슴을 찡하게 하는 이 무굴 시대의 영묘는 황제 샤 자한(Shah Jahan)이 자신의 두 번째 아내였던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추억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그녀는 1631년 출산 중에 죽었고 가슴이 찢어진 황제는 밤사이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렸다고 전해진다. 타지마할 공사는 그 해에 바로 시작되었지만 1653년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타지마할은 어느 각도에서 보건 믿을 수 없을 만큼 우아하지만, 가까이 가서 세부를 살펴보면 정말로 놀랍다. 준보석들이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라 알려진 공법으로 아름다운 패턴을 이루며 대리석 벽에 박혀 있다. 타지마할의 설계와 건축에 기울인 정밀함과 주의는 타지마할을 강 건너에서 볼 때나 바로 눈앞에 두고 볼 때나 똑같이 감동적이다. 타지마할은 월요일에는 문을 닫는다. 아그라의 다른 주요 관광지로는 거대한 붉은색 사암으로 된 아그라 요새(Agra Fort)가 있는데, 역시 야무나 강 방죽에 있다. 귀모양을 하고 있는 요새의 엄청난 이중 방벽은 높이가 20m(65피트) 이상이며 총 거리는 2.5km(1.55마일)이나 된다. 방벽 주위는 냄새나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요새 안에는 장려한 집회장, 모스크, 사무실, 정원 등이 늘어서 도시 안의 작은 도시를 이루고 있다. 불행히도 모든 건물이 관광객 상대로 개방되어 있지는 않고 흰 대리석으로 된 진주 모스크(Pearl Mosque)도 마찬가지인데, 이 건물은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라는 평을 듣는 건물이다. 또 다른 볼거리는 이티마드-우드-다울라(Itimad-ud-daulah)를 비롯한 무굴시대의 보석으로, 이 보석의 디자인이 타지마할의 건축에 이용되었다. 시캔드라(Sikandra)에 있는 아크바르(Akbar) 영묘도 볼만 한데, 이 건물은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기독교의 모티프를 모두 섞어놓아 아크바르 자신이 발전시키려 시도했던 혼합 종교 철학과 많은 점이 비슷하다. 아그라는 델리에서 가까우므로(200km, 125마일)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하다.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므로 비행기, 버스, 기차 중 원하는 교통수단을 택해서 탈 수 있다.

다람살라(Dharamshala)
인도 서북쪽의 히말라야 산맥의 고지대에 있는 작은 도시로 티벳 망명정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히말라야의 장관을 볼 수 있고, 티벳 전통과 불교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곳이다. 해발 고도가 1,200~1,700에 이르기 때문에 여름에도 선선한 기후를 보인다. 이 때문에 여름철에는 인도의 무더운 여름날씨를 피해서 이곳으로 오는 여행자들이 많다. 다람살라는 지형에 의해 아래쪽 다람살라와 흔히 맥레오스 간지(Mcleod Ganji)라 불리는 위쪽 다람살라 두 지역으로 나뉜다. 두 지역은 해발고도에서 500m이상 차이가 날뿐만 아니라 사람과 문화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아랫동네에 인도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것에 비해, 맥레오드 간지에는 티벳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며 달라이라마가 있는 곳도 이곳이다. 맥레오드 간지는 아래쪽 다람살라에 비해 풍광이 수려하고, 티벳문화를 접할 수 있어서 거의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맥레오드 간지에 머문다.